
술독에 빠진 사람.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그렇다고 고주망태거나 인사불성은 아니다. 우리 술의 향기로움에 취해 그 술독의 깊이에 한없이 빠져드는 사람인 것이다. 전주 전통술박물관장 다음( ). 그를 아는 이들은 “긍께, 진짜 이름은 뭐요?”라고 호적이름 캐묻지 않고 자연스레 그를 ‘다음’이라 부른다. 차 다(茶)에 평화로울 음( ). 그런데 언젠가 신문에 실린 술박물관 소개기사를 보니 자신이 ‘多飮’이 돼있더란다. 졸지에 ‘많이 마시는 사람’이 돼버린 것인데, 필시 그 앞에는 ‘술’이 생략돼 있을 터. 그걸 보고 껄껄 웃었단다. 술박물관장이라니 어지간히 술 많이 마시는 사람으로 생각했구나, 그도 맞는 생각이라 싶어서. 술박물관 관장이란 직업, 혹은 일. 누구나 부러워한다. “원 없이 술 마시겠다”고. 정말 그럴까. 그는 다만 웃음으로 대답한다. “하하, 좋지요, 아침부터 술 마셔도 음∼ 아침부터 일을 열심히 하고 있구나 생각해줄 테니까.”
집집마다 술 빚던 가양주 전통 잇고 싶어 전주 전통술박물관은 지난 6월 풍남동에 문을 열었다. 마당있는 한옥집이다. 그 마당엔 굽이도는 물에 술잔 띄울 수 있는 유상곡수(流觴曲水)도 있다. ‘술잔을 건져올려 입에 털어넣으면 목안으로 쏟아지는 파란 하늘’이라고 꼬시니 누군들 술맛당기지 않으랴. 안에 들어서면 누룩고리 술춘 체다리 용수 고소리 등 술 만드는 도구나 술 담는 도구를 비롯 각 지역의 이름난 민속주들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술이 있(었)다더라고 박제화해서 구경시키는 것은 술박물관이 생겨난 뜻이 아니다. 과거형에 머무르지 않고 술박물관은 사라져간 가양주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 이어가고자 한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김치 담고 된장 고추장 담그듯 집집마다 술을 담지 않았는가. 집집마다 그 고유의 술맛과 제조비법들이 살아난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 될 것인가.” 이제 김치도 된장 고추장도 집에서 안 담그는 세상이니 술 빚기는 더더욱 엄두를 내기 힘들겠지만 그럴수록 우리 술을 찾고 전승하려는 몸짓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박물관 한 켠에 술빚기의 ‘현재진행형’으로서 숙성실과 발효실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술익는 소리 들어보았는가. 그 소리는 의성어로 담아내기 어렵다. 자신의 귀로 저장해서 기억할 밖에. 그는 “우주 생성의 기운이 술항아리에 담겨있다”고 말한다. 그 소리를 증폭해서 들을 수 있게 발효실밖에 스피커를 달아놓았다. 고두밥을 쪄서 누룩과 버무려 술독에 담아 발효를 시키면 밑에서 불이라도 지핀 듯 부글부글 끓는다. 옛사람들은 그게 신기해서 물 속에 불이라는 의미로 ‘수불’이라 불렀다. 수불이 변해서 수을이 되었고 술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수을’에서 이름을 따서 전통술박물관의 고유명칭은 ‘수을관’이기도 하다. 9월부터 한 달에 한번씩 술 잡지 ‘수을’도 발간한다.

싸게 많이 마시고 흠씬 취하는 데만 치우치면 안돼 특별하고 재미난 일들, 그 중에서도 우리 술이 우리 일상에 자연스레 쑤욱 들어올 일들을 늘 궁리하는 술박물관에선 술의 명인들을 초대해 술만들기 체험도 하고 우리술 시음회도 열고 있다.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목요일 전주 이강주의 명인 조정형씨와 함께 하는 술강좌를 열고 있고 첫 주 셋째 주 토요일엔 우리술 빚기 체험을 한다. 술 만드는 재료는 토종만 쓴다. 우리 술 만드는 일이란 바로 밑바닥에서부터 우리 것을 찾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 술을 한 번 빚어보면 술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진단다. “술을 그냥 ‘마셔 없애는 것’으로 쉽게 소비만 하려 드는 게 아니라 공력과 오랜 시간과 기다림이 들어간 ‘음식’으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 불교미술 음악 차 탁본 할 것 없이 두루 뛰어난 그가 요새 가장 힘쏟는 일은 술 빚기이다. 술 빚는 재미가 술 마시는 재미보다 크단다.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엔 우리술 시음회가 열린다. 대량생산되고 대량소비되는 술에선 맛볼 수 없는 우리 술 고유의 향과 맛을 만날 수 있다. 달큰하고 쌉싸름하고 구수하고 알싸하고…그 수많은 맛들이 각각의 술들마다 알뜰히 담겨 있다. 술은 지역의 기후나 특산물에도 영향을 받지만 만드는 사람의 손길 따라 마음 따라 각양각색으로 빚어진다. 술맛은 이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시는 장소 따라, 마시는 상대 따라, 마시는 삭신 따라 무수하게 달라진다.” 좋은 술이라면 발렌타인 30년산이니 하는 외국술들만 꼽는 이들에게 그는 우리 술을 제대로 만날 기회들을 주고 싶다. 알지 못하고서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니. “비싸다, 명절 때나 마신다, 나이든 이들만 마신다…등등은 민속주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오해다. 싸게 다량 섭취해서 흠씬 취하는 데 치우친 술문화라든지, 술은 어차피 몸 상해가며 마시는 거라는 생각들부터가 달라져야 할 것 같다.”
한잔 술에도 우리 역사와 사람살이가 담겨있으니 완주 송화백일주, 금산 인삼주, 한산 소곡주, 안동소주, 김천 과하주, 문배주, 담양 추성주, 진도 홍주, 낙안읍성 사삼주 등 맥을 이어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전통 명주들엔 굽이굽이 사연들이 많기도 하다. 술 하나에 이야기가 몇 보따리. 그래서 그는 “술 쉽게 볼 것이 아니다. 한잔의 민속주에도 우리네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가혹한 주세법으로 수탈을 일삼았던 일제 식민지배라든지 술을 빚는 원료를 통제했던 군사정권시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 술들은 몇몇만 어렵사리 살아남고 희석식 소주와 맥주가 술시장을 점령해버렸다. 그런 현실이 안타까운 그는 술박물관 주변에 개성있고 정취있는 주막들이 늘어선 술거리를 만들고 싶고 오랜 세월 고집스럽게 술빚기를 그치지 않아온 전국의 술 명인들을 다 불러모아 술축제도 열고 싶단다. 그 마당의 흥취는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것은 아니다. 술박물관엔 계영원(誡盈院)이 있다. 잔이 넘침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한 잔의 술에서 욕심을 경계하고 정도를 지키는 뜻이라든지 ‘모자람의 미학’을 음미하라는 것. 세월 따라 시대 따라 술 마시는 예법도 달라지겠지만 그가 옛어른들의 술마시기 예법이라며 일러준 말에는 귀기울일 대목들이 많다. “술은 대개 석잔 이상이 훈훈하고 다섯 잔은 기분이 좋으며 일곱 잔은 흡족하고 아홉 잔은 지나치므로 일곱 잔 이상은 권하지 않는다. 술과 음식을 너무 질펀하게 하지 않고 술 대접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답례를 하되 바로 그 날 2차 3차를 하는 것은 경박한 풍조다…”등등. 바야흐로 술이 마음을 훈훈하게 덥히고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주홍빛으로 따뜻하게 물들이는 계절이니, 그 훈훈한 자리에 우리 술이 함께 있는 정경은 어떠한가.
전주전통술박물관 관람은 오전10시∼오후6시,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문의는 063-287-6305. 출: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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